어드미션과 리젝때문에 봄이 만개할 이맘때쯤 유학을 준비하는 많은 분들의 가슴이 진달래보다 더 붉게 타 들어가고 얼굴은 개나리보다 더 노랗게 될 거라고 짐작이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러분들보다 나이만 많고, 어리석은 미저리를 보는 동안 괴로움을 잊으셨음 좋겠다. 더 괴로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청혼을 받고 , 수락하긴 했지만 변화는 없었다. 우리에게 있는 커다란 외면적, 내면적 차이만큼이나 모든 것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한국어를 배우러 갔었던 잭은 얼마전에 돌아 왔다. 그러나 냉정한 우리는 떨어져 있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에 잭이 학교로 돌아왔다고 해서 당장에 달려가 내 못생긴 입술을 미친 듯이 들이댈만한 열정을 발산한 건 아니었다.

약 1년 동안 머물었던 잭은 한국어 실력이 부쩍 늘었다. 사람 '인' 과 들 '입'과 여덟 '팔'을 헷갈려하긴 하지만 쉬운 수준의 한문도 읽게 되었고, 우리가 자주 쓰는 사자성어까지 익히게 된 그가 나는 자랑스럽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마웠다.

잭이 우리 부모님의 허락을 받기까지는 저 한문을 구분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한 노력이 필요했다. 추석과 설에도 찾아가서 가족으로 받아들여줄 것을 청했는데, 그런 용기를 낼 수밖에 없었던 그의 심정을 나는 감히 헤아린다고 말할 수 없을 거다.

잭이 한국에서 저렇게 애쓰는 동안 나도 잭의 가족과 친해지려 애쓰긴 했다. 그러나 나의 노력은 너무나 미미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건 내 탓이 아니었다.

나를 예전부터 딸처럼 챙겨주셨던 잭의 부모님과 친척들로부터 점수를 따기는 쉬웠다. 오래 전에 언급한 적이 있지만 잭의 어머니는 벨기에 분이시다. 이분으로부터 시작하는 잭의 가족의 다양성은 정말 미국의 특성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한 것이다. 잭의 어머니 형제 중 2명이 미국에 계시는데, 어머니의 생신 날 캔자스에 가서 나도 참석하게 되면서 그 분들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불어를 할 줄 안다는 것만으로도 그 분들의 마음에 들 수 있었다. 잭의 숙부가 되시는 이 두 분의 여러 자녀들 중 한명은 중국인과 결혼했고, 한명은 루마니아인과 결혼했고, 또 한명은 호주인과 약혼을 한 상태인데, 나는 이 가족은 아마도 국제결혼을 선호하는 피가 흐르는가 싶었다. 이방인인 나는 이방인임을 느낄 새가 없었다.

우리 부모님은 언제나 내가 하는 일을 지지하셨는데 잭의 경우에는 내 의견에 반대하신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나는 부모님이 그 낯설음에 적응하실 시간을 백년이라도 드려야만 했다. 잭의 의견도 그러했다. 물론 우리는 백년이 아니라 단 1년만 기다리면 되었으니 다행이었다.

그러나 정작 부모님의 허락이후에는 우리 현실에 대한 스스로의 허락과 상념이 따랐다. 자신들의 사랑과 연애도 그렇지 않을텐데 우리의 겉모습만 보고 모든 걸 쉽게 해내 간다고 생각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내가 한국에서 알았던 사람들 중 몇몇은 색안경을 끼고 우리를 봤고 나도 그 색색의 시선을 이해할 만은 했지만 한 선배가 국제결혼의 대다수가 이혼을 하게 된다는 말을 듣고부터는 아마도 내 행복이 여기까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잭이 돌아온 후 나는 결혼에 대해 겁이 덜컥 났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될지는 여태 우리가 느껴왔던 불편한 시선보다 더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잭의 학교에 찾아갔다. 잭이 나를 1년만에 보며 반가워 눈물을 그렁대어서 동료들이 놀란 덕택에 따로 양해를 구할 것은 없었지만,, 나는 잭의 동료에게 양해를 구해 밖으로 내보내곤 잭의 책상 맞은 편에 앉았다. 그의 등뒤로 들어오는 햇빛 때문이 아니라도 나는 잭의 눈을 바로 쳐다보기에는 겁이 났다. 나는 망설이던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하는 내 말이 끝나면 나를 미워하게 될지도 모를거라고. 잭은 내가 잭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그건 아닐거라고. 난 너가 어느 날 멋지고, 더 좋은 사람에게로 떠나고 싶다면 우리 사이에 아이가 몇이 되든 아무소리 하지 않고 보낼 수 있을 만큼 널 사랑한다고. 너가 있었다는 사실이상 바라는 것은 없다고.

이러한 사랑에 대한 태연한 감정은 잭에게 뿐만 아니라 내가 짝사랑 했던 사람들 모두에게 가졌던 것이었고, 나의 자세는 이래야 한다고 믿었다. 어떤 때는 주위에서 내게 이런 자세를 요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잭은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한참을 책상앞에 서 있다가 앉아서는 갑자기 책상정리를 하는 척 했다. 그래도 계속 책상 위는 서류들이 쌓이고 더렵혀지기만 했다. 나는 그 정적을 깨려고 일어나서 커피를 탔고 책꽂이의 책을 뒤적거려 보았지만 잭은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한 말이 너무 신파적이고 유치했나를 생각하며 2잔의 커피와 1컵의 물을 다 마신 후, 잭은 웃으면서 한국에서 춘향전을 본적이 있다고 말을 시작했다. 자신은 재미있게 보긴 했다고 했는데, 잭이 이몽룡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잠깐 웃긴후, 내게 춘향이 감옥에 있을 때 찾아와 이몽룡이 한 행동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 물으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잭의 웃음속에서 나의 잔인함을 깨우쳤다. 우리가 생각한 것은 같았다. 춘향의 충절을 확인사살하는 이몽룡이 바로 나임을.

잭은 식사나 하러가자고 해서 밖으러 나왔고 학교를 걸으며 이몽룡에 대한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 때문에 감옥에 갇혀 생사를 오고가는 춘향에게 왜 하루밤을 더 괴롭히느냐고. 화창한 날이라 더욱 반짝이던 내 손의 반지를 잭은 뺏는 척 해보았고, 나는 반지를 뺏기지 않았다.

얼마전에 연구소의 여자연구원들끼리 모여 여성 잡지들에 나오는 남자들의 행동으로 애정을 확인하는 방법 어쩌고 하는 것을 깔깔거리며 본적이 있다. 그런데 거기에 나온 분류에 잭을 넣어보니 겉으로는 수도승인척 하지만 음흉한 변태에 속한다는 결론이 나왔고, 동료들이 얼마나 웃어댔는지 모른다. 공부밖에 모르는 잭과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지만 사실 나는 몇일간 나름대로 대단한 고민에 빠졌었다. 왜 잭은 날 자주 안아주지도 않는 걸까. 주위의 미국사람들은 스킨쉽이 대단한데.

내가 이런 것을 바라는 응큼함을 지닌 사람은 아니었고, 몇 일이 지나자 이런 걱정을 하는 스스로가 우습기도 했으며 섹시해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고, 금방 포기했다. 잭이 한번은 절대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을 콘디 라이스에게 섹시하다고 했는데 그녀처럼 되어 볼까도 싶어서 인터넷을 뒤져 그녀의 사진들을 분석했지만 허사였다. 내겐 그런 멋진 옷들과 악세서리를 살돈이 없었다. 잭과 어느 날 통화를 하며 나도 섹시해질 수 있을까 했더니 잭은 호탕하게 계속 웃기만 하다가 La vie en Rose를 불러 보랬다. 잭은 내가 약간 엉터리로 발음하는 불어의 r발음을 좋아한다.

우리는 이렇게 엉성한 사이로서 결혼을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서로의 고집이 이렇게 센 줄은 요즘에서야 처음 알았다. 잭은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길 원했고, 나는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내가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을 마냥 신기하게 여겨 오려고 하는 걸 피하고자 미국에서 올리길 원했다. 결국 한국서 간단하게 치르기로 했다. 미저리같은 성격으로는 절대 결혼하지 못 할거라며 대학 내내 내 가슴에 상처를 준 사람들을 내 결혼식 날 만나고 싶지 않았던게 속좁긴 하지만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음달에 결혼을 올리려면 바쁠 것 같지만 내 최대의 소망이었던 간소한 결혼식을 이루어내기 위해 사실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는 것 밖에 할 일은 없으며, 또 두터운 화장을 준비 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미술을 하는 후배가 직접 심플한 드레스를 만들어주기로 했다.

잭은 그가 그렇게도 가고 싶어하던 벨기에의 연구소로 여름에 가야하는데 결혼 후 제대로된 연애를 해보자는 잭의 소원대로 나는 함께하기로 했다.

앞으로 한참동안은 내가 정말 즐겼던 여러분들의 글을 읽으러 이 싸이트에 오는 일을 못할 수도 있다. 인터넷을 할 수 있다면 한국의 뉴스를 볼 수 있는 싸이트 다음으로 찾는 이곳에 언젠가 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축하해주신 분들에게 정말 깊은 감사를 드린다. 다른 이야기를 보려고 들어왔다가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많은 분들의 축하와 격려와 충고를 가슴깊이 새겨놓을 것이다.

어떤 분의 꼬리말을 보고는 반성도 많이 했다. 내가 받는 사랑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면 과언이겠지만.. 기왓장가루를 묻히는 볏짚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놋그릇의 빛을 찾아 줄 수 있는.

우리 둘 다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서로의 윤기를 찾아내 주도록 열심히 살 것이다.

미저리의 결혼(13)

감사드립니다.(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