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대학 이후 처음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내 대학시절 4년동안 성격상 과모임에 잘 어울리지도 못했고 그래서 남자 친구도 없었긴 했지만 , 거의 15년간이 나의 1순위들이었던 2명의 아줌마가 되버린 여자들과 나는 몇일간 설악산에 다녀왔다. 우리들 중 불의의 사고로 누군가 세상을 빨리 떠나게 된다면 그녀들의 자식을 맡아서 키울 수 있을 정도로 나는 그들을 아낀다.

이렇게 절친한, 어느새 초등학교를 보내야 할 딸과 또 둘째아이의 돌을 막 치른 친구들과 푼수같은 여행을 다녀온 후 지쳐서 멍하니 있다가 해커스에 들어와서 어디까지 얘기를 했나를 보니 내글을 기다리고 있다는 어느분의 꼬리말을 보는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외롭게 혼자 있는 이 밤에 감정적으로 받아들여져서,, 과장되었겠지만, 내가 존재하는 걸 아는 건 내 눈앞에서 실재로 내 목소리를 듣는 사람만은 아니구나라고 생각된다. 잭은 이 나이에도 인터넷상에서의 속풀이의 장점을 믿는 내게 항상 경고하지만 나는 잭의 그말을 들을 수 없을 것만 같다.

나는 한국말을 모르는 한국인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주겠다는 어느 정도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의 한글교습을 시작한거였다. (그의 가명은 피에르로 하겠다.) 한글교습을 선뜻 승낙하고 나갔던 나와 달리 처음에 그는 그다지 나를 반가워 하지는 않았다. 그의 굳은 얼굴 때문에 나는 어정쩡한 얼굴을 계속하고 있었고, 서로의 소개나 간단히 했을뿐이었다. 피에르는 내게 한국에 대해서 물어보거나 하지 않았고 2주가 넘도록 일주일에 2번씩 딱딱하고 지루한 수업만이 계속 되었었다. 나는 그가 한국어를 배우고 싶지 않은데 어머니때문에 억지로 배우나 싶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건 그는 한글을 알고 있었고 읽을 수는 있는 수준이었는데, 그다지 흥미로워하지 않았다. 속좁은 나는 덩달아 흥미롭지 않아했다. 2주가 지나고 네 번째의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날엔 난 화가 났었다. 뭣에 화가 났는지 모르는 상태로 약간 얼굴이 상기된채 집에 들어서니 오전에 수업을 하고 일찍 돌아와있던 잭이 내 기분을 더듬더니 무슨일이냐고 물었다.

"피에르는 잭보다도 한국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죄없는 잭에게 괜히 쏘아부친 내가 스스로 챙피해서 맛있게 저녁을 해먹는데, 다 이해했다는 표정의 잭이 슬그머니 말을 열었다. 자신에게도 한국인 입양아인 사촌이 있지만, 피에르가 꼭 한국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보여야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 관심은 가지려하지 않아도 저절로 몸에 배어있는데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서 아직 드러내기가 익숙하지 않은 것 뿐이라고, 아직은 그가 수줍어하는 단계일거라고. 내가 젊은, 그리고 내가 꽤 잘생겼다고 설명한 한국남자를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만나는 것은 질투할만 하지만 나부터 이해하고 그사람에 대해서 궁금해하라고 충고해주었다.

설거지를 마친 후 잭은 괴테의 말을 인용했다. 진정으로 나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을 마음으로부터 움직이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그리고 그는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은 해냈다고 했다.

그 주말에 잭과 나는 대청소를 했는데 나는 내내 피에르란 사람에 대해서 생각했다. 주말 후 다시 공부하는 날이 되었을 때 나는 잭의 충고대로 노력했다. 중요한건 한글을 한마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제일 우선적으로, 그 사람의 상황적 특이함에서 갖는 세계에 관심갖는 것이라 생각했다. 다른 인종이었다면 동정으로 비춰질수 있겠지만, 나는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이건 적어도 '이해하는 것'이라고 믿었었다.

나의 마음가짐이 바뀌니 그도 바뀌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교습시간이 넘어서도 그는 나와 있는 것을 편하게 생각하며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피에르는 이미 열달전에 이혼을 한 상태 였고, 출판사의 부편집장이었다. 나보다 네 살이 어린 그는 내게 갈수록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한국어 진도도 많이 나갔다.

피에르와 잘 지내고 있던 즈음, 나는 잭의 얼굴을 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어느 정도의 정착기간이 끝나고서 본격적인 프로젝트에 들어가자 잭이 집에 들어오는 날은 일주일에 세네번이었고 아주 가끔 내가 연구실에 들러볼때면 연구실 한구석의 낡은 소파 두 개를 붙이고 엎드려 있었다. 이렇게 바쁜 것이 그에게 그리고 나에겐 대학원 때부터 여태까지 당연한 거였지만 나는 연구실에 붙어서 실험을 하는 연구가 아니므로 대부분 방에서 홀로 공부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생활반경이 다르다. 게다가 함께 살면서 자주 그렇게 힘든 모습을 보고있는건 내게 익숙치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 둘다 지금까지 그래왔지만 삶에 대한 스트레스는 함께 풀지만 연구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집에서 서로에게 내비치지 않게 노력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그때가 아니면 만들지도 않았을 별맛없는 그러나 직접만든 빵이나 샌드위치와 잭이 좋아하는 직접 집에서 우려내는 자스민차를 아주 가끔 가져다주었다. 내마음은 더욱 자주 그렇게 해주고 싶었으나 학교의 연구실도 엄연한 직장이기 때문에 자주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나는 브뤼셀에 아는 사람이 전혀 없이 혼자였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잭의 연구실에 들를 때가 있었는데, 나도 일일연속극이나 주말드라마에나 나오는 평범한 여자임을 새삼 깨달은 순간이 다가왔다. 항상 잭과 같이 있는 예쁘장한 연구원 학생을 나는 어느샌가 곱지않은 시선으로, 들키지는 않게끔 힐끔거리고 있었다.


불어공부를 어찌하느냐고 질문하신 분이 계셨는데 대답드리기가 자신은 없지만 내가 했던 방법을 적어본다. 불어는 내가 배운 다른 언어인 일어나 영어보다 더 어려워서 고등학교때도, 박사과정 중에도 그리고 파리에서도 직접 배워봤지만 제대로 하기가 정말 힘들다. 지금도 문법적으로 완벽한 토론을 구사하기는 힘이든다. 박사과정중에 배울 때는 사실 영어로 배워서 그런지 나는 뜬구름 잡는 것 같았고, 차라리 한불 불한 으로 이해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집에서 부탁을 해서 여러 가지 교재(문법, 작문, 독해)를 갖추고 공부한 결과 프랑스로 가기 전엔 웬만한 신문이나 사설등은 모르는 단어 몇 개를 찾아가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또한 꼬박 6달이 걸린 어휘암기에 매달린 결과였다. 이것은 내가 불어를 어느정도 할 수 있어야 학교에서 교환연구생 비슷한 명목으로 파리에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절박해서 가능했을 것이다. 예전에 읽었던 최정화교수의 공부방법도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인터넷으로든 또는 미국에서 공부하시는 것이라면 학교에 프랑스어판의 신문을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텐데 적어도 일주일에 사설 4~5개 정도 알맞은 분량을 선택해서 요약하고 프랑스인 튜터에게 수정을 받는 것이다. 나는 운이 좋았어서 친절한 튜터덕분에 나름대로 괜찮은 실력향상을 보았다. 그리고 회화에 있어서는 다른 방법이 있을리 없다. 프랑스 사람과 최대한 많은 접촉을 하는 것인데, 사실 미국에서 그것은 힘든일이다. 나같은 경우는 서점에서 프랑스어 회화 기초 교재를 사서(예를 들면 파노라마1권 ) 입에 달고다니며 외웠는데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파리에 갔을 때 적어도 알아듣는데에는 빨리 적응하게 되었고 나또한 시간이 지나자 외웠던 표현 방법들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아주 기초시라면 고등학교 자습서도 좋겠지만, 파노라마 같은 기본회화교재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벌써 오래 되었으니 옛날 방식일수도 있어서 도움이 될지 잘 모르겠다. ====

잭은 학교에서 시작한 프로젝트가 잘되어가지 않는 눈치였지만 집에 하루 걸러씩 들어와서 짜증내는 적은 없었다. 나는 많은 일을 벌려놓기는 했지만 아무 강의나 직장이 없으니 오히려 홀가분하게 일할 수 있었다. 물론 미국에 돌아가서 학교나 연구소에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잠시라도 놀았다는 티가 조금이라도 나면 바로 퇴출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나는 논문에 매달리고 가시적인 성과물을 발표해야만 했고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의 상황이다.

잭의 연구실을 그나마도 점점 덜 들리게 된게 그 여학생이 신경쓰여서 그랬던건지 아닌지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 브뤼셀에서 혼자 지내다보니 잭에 의해 의기충만해져서 미저리라는 본분을 망각하고 있던 내가 보잘것없이 다시 느껴지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내게는 브뤼셀 사람들이 다소 차가운 분위기로 다가왔는데 잭은 항상 연구실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고 좋다고 했고 가끔이지만 그 여학생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상태로 시간이 지났다.

8월, 별로 덥지도 않던 날 시립 병원에서 나는 임신 했음을 확인하게 되었는데 우리가 얼마나 기뻐했는지는 표현할 수 없다. 바쁜 와중에도 나는 약 1주일간은 여왕생활을 했다. 잭은 백화점에서 봐둔 물고기모양의 팬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사주었고 평소에 단 것을 좋아하지 않아 잘 먹지도 않던 초코렛을 벨기에산 고급품으로 딱 한번 먹어보기도 했다. 이러한 사소한 사치와 짧은 기쁨들을 제외하면 나는 나의 부모님과 잭의 부모님외에는 임신한 사실을 알리지 않고 생활했다. 잭만 제외하면 아무도 나를 상전 받들 듯 해주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난 평소와 달라지고 싶진 않았다.

한달이 지나고 내가 죄스럽게도 바랬듯 아이를 가졌음을 잊은채로 평소의 생활을 했는데 그 평소의 생활이란게 사실은 조금씩 벅차져서 느끼질 못했던것이다. 여러 가지 생활에 적응이 되면서 늘어나는 연구물과 그와 함께 늘어가던 브뤼셀에서의 생활에 대한 불만족감이다. 미국에서도 잘 적응 했었는데 브뤼셀에는 정이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어느날 오후 피에르와 한글 수업을 마치고 잭의 연구실에 들렀는데 내가 말한 그 여학생의 말투와 눈빛이 내게는 여전히 수상쩍었다. 평소에 브뤼셀에서 느낀 것 중 하나가 이네들이 영어권에서 특히 미국에서 온 사람에게 매우 호감을 갖는 다른 것이었다. 잭이 내겐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이 사실에 대해 과민반응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보였는데 어쨌든 사실이라 우기고 싶다. 게다가 잭은 반은 벨기에 사람이니 이 젊은 여학생에게 호감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비록 잭이 미남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힐끗보긴 했지만 그 여학생의 엠마뉴엘 베아르의 눈을 닮았었다. 머리는 짙은 갈색인데 나의 칠흙같은 머리보다야 못하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은 부질없는 위로일뿐이었다. 그래도 내겐 그녀의 눈이 아름다울뿐 눈빛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다. 내가 찾아간날 그녀는 나를 야릇하게 쳐다봤는데 드디어 그날 저녁 잭은 식사 후 뉴스를 보다말고 뚱딴지 같이 아니면 예정되었던 대로 나를 약올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잭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잭이 무슨 생각으로 다 내게 털어놓았던 건지 이해할 수 없다. 물론 그게 다가 아닐수도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는 듣다 못해 속은 타면서 겉으론 웃으며 잭에게 말했다. 그렇게 엠마뉴엘 베아르의 섹시한 눈을 가진 여자가 내게 매력적인 동시에 거부적이지 않다면 난 레즈비언 인거라고.

잭은 그녀가 어떤식으로 했건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지만 내가 질투하는 걸 바랬던건 같다. 그가 나를 놀리며 말했다. 셰익스피어의 대사중 질투는 사랑의 자매라고, 다만 숨기고 있을 뿐인데, 나도 그걸 숨기고 있다가 들킨거였으면 좋겠다고.

나는 안도감도 들었고, 죄책감도 들었다.

피에르와의 수업이 계속되어 나가는중, 내가 무심해서인지, 관심받는거에 익숙치 않아서인지 난 피에르의 감정을 알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수업만 열심히 했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 그의 늘어가는 이야기 보따리를 내게 힘든 불어로든 그에게 힘든 한국말로든 풀어놓았다. 나는 그가 즐겁게 사는 일상 사이사이 영원한 이방인으로서 얼마나 힘든 감정을 숨기고 사는지를 문득문득 발견했다.

그러다가 그에게 함부르크로 발령이 나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하느라 시간이 부족해서 더 이상 한국어수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잭이 분명 연구실에 박혀 있어야 했던 어느 저녁, 나는 이래저래 우울해져가고 있었는데 마침 피에르가 마지막으로 함께 식사하고 영화나 보자고 했다. 그가 직접 요리를 해준다고 했다. 나는 가끔씩 그의 집에서 한글수업을 한적도 있었기 때문에 별문제 없이 생각하고 갔었다. 우리는 ' 타인의 취향'이란 영화를 봤는데, 영화를 본후 느낌이나 생각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이미 8시 반을 넘겨가는 터라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요 몇일 너무 자상하게 대해주었고, 그날 저녁 내내 계속 배려해준게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갑자기 서둘러 나왔다. 손수 만든 맛있는 랍스터 저녁(그는 정말 요리를 잘한다.)을 감사하다고 말하며 전차 정류장으로 가면서 혹시 차라도 원하면 사던지 아님 다른 원하는 걸 말해보라고 했는데, 그는 내말이 끝나자 마자 벤치에 앉아보라고 했다. 쟈켓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더니 땀을 빼며 연습해도 고쳐지지 않았던 독특한 발음으로 그가 쓴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그는 타인의 취향을 이미 봤던 것이었다. 내가 서둘러 나오지 않았으면 집에서 읽어줄 생각이었던거 같았다. 내가 당황하지 않은척 하려 했으나 잭에게도 항상 들키듯 피에르에게도 내가 당황했음이 역력히 드러났다. 나는 한마디라도 하고 싶었으나, 나는 항상 당황하면 말을 잃는다. 편지봉투에 편지를 다시 집어 넣고 내손에 쥐어준뒤 그는 혼자서 비주를 내게 해줬고, 나는 내가 무언가를 잘못 이해했나를 머리속으로 계속 생각하며 전차가 오자마자 허겁지겁 탔다.

집에 들어오니 잭이 있었는데 핸드폰이 없던 내게 연락이 안와서 걱정했다며 그 하얀 얼굴이 발개져 있었다. 난 피에르의 집에서 식사를 했다는 걸 말하는 순간 잭의 표정을 보고 곧바로 후회했다. 혼자 서점에라도 박혀있었다고 말하면 되었을 것을. 내게 연애는 처음이라 얼마나 미묘한 것이 두 사람을 안개속에 잠기게 하는지 몰랐다.

17. 에테시아 바람 (3)

18. 에테시아 바람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