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은
저녁을 먹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 주섬주섬 뭔가를 차려 먹었고, 나는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하면서 잭에겐 미안하지만 계속 피에르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잭은 연구실의 여학생에 대해서 둘 사이에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물론 별일은 아니었지만, 솔직하게 말해주었는데 나는
왜 그렇게 못할 것 같지 않은지를 생각했다.
내가 좀 깔끔하지를 못해서 외출하고 돌아오면 항상 옷을 벗어 침대위에 던져 놓는다. 정리정돈을 아주 좋아하는 잭은 비록 잔소리를 하지 않지만
내가 던져놓은 옷들을 차곡차곡 정리를 하는데 그날 저녁에도 내가 입은 쟈켓을 툴툴털며 정리하려는 순간 피에르에게서 받은 편지가 떨어졌다.
잭이 주워서 봉투에 '미저리에게'라고 한글로 써있는 것을 보는 동안 나는 머리를 닦느라 수건을 뒤집어 쓴채로 잭을 바라보는 쪽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피에르가 독일로 가게 되어 마지막으로 편지를 쓴거라고 말했다.
몇초간 또렷이 봉투를 본후 탁자에 올려 놓고서 자켓을 건다고 침대위에 있는 옷걸이가 안보이는지 옷걸이를 찾는다며 방을 왔다갔다하고, 옷장을
열었다 닫았다 하고 내 니트를 반듯하게 개켜서 옷장선반에 놓고서 방을 나가다 다시 들어왔다. 자신도 한국에서 한국어 수업할 때 마지막날
선생님께 한글로 서툰 편지를 쓴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피에르 글씨보다는 더 예쁘게 쓴다며 덫붙이고는 방을 나갔다. 잭은 그 다음날
아침이 되자 여전히 밝은 모습으로 학교에 갔다.
피에르에게서 그 후 일주일 뒤 집으로 전화가 왔다. 내 전화가 단 한통만이라도 오길 기다렸다고 말하는 그에게 나는 그가 기다리고 있을 대답은
하지 않은채 독일에서의 일이 다 잘되길 바라며 건강하긴 바란다고 전했다. 내가 연애한번하지 않고 대학을 다닐때는 공부에만 묻혀있던 터라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이 무슨 느낌인지를 몰랐었다.
무지는 무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나는 별로 남자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건 공부를 해서 성취하는 것만큼
기쁜 일이란건 잭에게서 배웠고, 그 관심을 유지하기 위해 때로는 대학시절엔 내게 한없이 유치했던 행동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오해란 주의의 상황이 내 불안감에 맞아 들 때 생겨났다. 내가 외로운 한국 사람으로서 입양된 한국인을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면 잭은 피에르에
대해 떨떠름해하지 않았을 것이고, 나 또한 잭이 벨기에인의 핏줄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미스벨기에들 사이에 그가 있었어도 불안해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리고 이주일정도가 지났다. 많이 쌀쌀해지기 시작한 날이었다. 시애틀에서 전화가 왔다. 나의 별이 하늘로 돌아가셨다고.
작년 이맘때쯤 해커스에서 나의 선생님에 대해 글을 쓸적이 있는데, 그 전부터 앓으시던 선생님께서는 거의 1년을 아파하시다 떠나셨다. 난
불행히도 워싱턴에 가볼 수가 없었다. 몇일을 선생님께서 제일 좋아하시던 LISZT의 Liebestraume 3번을 파블로 카잘스의 첼로
연주판으로 계속 들으며 슬퍼했다.
잭 또한 내가 선생님께 얼마나 감사해 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지금 벨기에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미안해 했다. 슬픔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장을 보겠다고 나서는 순간 나는 복통을 느끼며 쓰러졌고, 겨우 기어서 잭에게 전화를 했는데, 그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나의 반나절이 걸린 대청소가 무색해지게 카펫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한바탕 소동이 지난건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내 슬픔에 대한 겉으로의 담담함은 언제나 그렇듯 속에서 곪는다.
잭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계속 미안하다며 반복하고 울었다. 자신이 날 충분히 사랑해주지 않아서 아기가 아빠를 못믿어
떠난것이라고. 나는 잭의 눈물을 닦아주며 미소지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충분하지 않은게 아니라 너무 넘쳐서 숨이 막히니 아이가 숨 쉴 자리가 없었던 것이라고, 그러니 날 좀만 덜 사랑해도 난 기쁠수 있다고.
그리고 잭처럼 잘우는 아빠는 어느 아기도 좋아하지 않을거라고.
아마 단 7주였지만, 난 감히 엄마였기 때문에 잭보다 강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다행히 다시 아기를 가졌다고 잭에게 말했던 날, 잭이 우리에게 브뤼셀에서 몇 달 동안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에테시아 바람같다고 했던 것을
내가 서울에서 딱딱한 백과사전을 찾기 전까진 그냥 지나가는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의미없는 말을 하지 않는 잭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풍속이 강하지 않은 이 여름에 부는 바람은 강수량이 거의 없는 쾌청하고 서늘한 날씨를 가져다 줄 것임을. 이 바람이 지나면 우리의
관계가 열매가 익는 서늘한 가을로 들어간다고 잭이 믿고 싶었음을.
올해 35살이 되는 나는 정상적이라면 아마도 한여름에 아이를 낳게 될 것이다. 나는 어디에 공개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에 친구도 별로 없고
가슴에 나의 이야기를 묻어두고 지나가는 편이라서 이 짐을 받는 것은 내 일기장들 뿐이다. 이런 내가 한심하다고 느낄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공부에 관한 것 이외에 내 취향에 대해서 어떤 취급을 당할지가 항상 겁이 난건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임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언제나
일기에다가 털어놓고, 살아갈수록 일기장을 바꿔야 하는 간격도 짧아진다. 나이가 들수록 할말은 많은데 친구를 사귀는 건 더 힘들기 때문이다.
내가 지난 일기들을 토대로 하여 해커스에 글을 쓸때는 지나간 감정에 대한 담담함과 사실에 대한 삭감은 있을지언정 보탬은 없다. 나는 전공이
국제사건과 역사와 정치를 비교분석하는 것이라 외국어를 많이 필요로 한다. 많은 외국어를 필요한다고 해서 내 능력이 유창한 실력에 미치는
건 아니다. 고백하건데, 다 제대로 못하는 수준이다. 불어는 고작 프랑스에서 1년 살아서 조금 할줄 아는 것이고, 대학 1학년때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고 싶었기 때문에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1년을 갔다왔기 때문에 겨우 읽고 쓰고 말할줄만 아는 그뿐이다. 나는 객관적이고 사실에 바탕한
글들에 더 흥미로워하지, 소설은 별로이다.
사실 해커스에서 내가 읽는 많은 글들이 시간이 지나면 기억에서 없어지고, 나또한 잊혀지는게 순리이고, 그뿐이지만, 나에게 여태 단 한번
존재했던 사랑이 만에 하나 단한명의 기억에 가상 또는 거짓으로 기억된다면 슬플 것 같아서 약간의 변명을 덫 붙인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가 모르는 순간 스스로를 미화했다면 잊어주시길 바란다.
나는 약 10년만에 명절을 가족들과 함께 보내게 되어 정말 즐겁다. 유학하던 시절엔 명절이 몇일인지 생각하지 않고 살았는데 그래야만 덜
슬프고 덜 외로울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 모두 즐거운 설날을 보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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