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 7일
미국에 온 지 꼭 한 달 반 만에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 가기 전 survival English를 가르쳤다. Bathroom, please. I don't know. I'm hungry.
Water, please. I am full (아이가 식탐이 있어서, 혹여라도 피자와 햄버거에 눈이 멀어 무지막지 먹어댈까 봐 이 부분은
식탁에서 여러차례 남편과 시뮬레이션까지 했다.)
버스 넘버 퉤니 나인!!을 여러 번 주입시키고 아이를 스쿨버스에 태워 보내고 학교로 갔다. 여섯 시간 내리 수업을 들어야 하는 날인데 (그것도
토론만 하는 수업!), 종일 아이 걱정에 신경을 분산시켰더니 피로도가 두 배는 되는 것 같다. 그날 저녁. 아이를 보자마자
나: 어땠어?
아이: 뭐가?
나: 학교, 재밌었어?아이: 응, 재밌었어. 그런데 그건 왜 물어?
나: @@@###?????
그 후 아이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줄줄이 사탕으로 엮어내었다.
그 다음 날.
역시 의기양양하게 귀가한 아이.
아이: 근데 엄마 오늘 국어 수업했어.
나: 국어? 아, 영어.
아이: 여긴 영어가 국어 수업인가 봐.
나: 어떻게 했는데?
아이: 그림일기를 쓰래. 그런데 내가 아직 영어 스펠링을 모르잖아.
나: 그런데 넌 그런 걸 다 어떻게 알았어? 너 영어도 못 알아 듣잖아.
아이: 그 정돈 상식이지.
나: ###$$@@@@@ (한국에서 초등학교 일학기를 보내고 와서인지.., 짜식, 눈치는 있어가지고서.) 그래서?
아이: 손을 들고, 선생님한테. “잉글리쉬 스펠링, 아이 돈 노! 먼데이, 레이크, 벤취, 런치, 냠냠!” 이렇게 했더니 선생님이 알아
듣던데. 근데, 엄마 뷰리풀! 그게 뭐야? 선생님이 내 그림보고 뷰리풀 그러던데!
나: ###$$$$%%%%%
학교 숙제 하느라 정신없는데, 자는 줄 알았던 녀석이 슬그머니 내 옆에 다가온다
아이: 엄마, 근데.., 나 알파벳 E 쓸 줄 안다. 엄마 글자 애기 글자 모두.
나: (짜증이 솟구치는 걸 참으며!) 음., 써 봐. 와!!! 잘 쓴다.
아이는 소문자 a b c를 쓰더니 그 글자들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아이: 테레비에 이렇게 되어 있더라구. 이게 무슨 뜻이야?
나: 응, 그건 abc 방송사 로고야.
아이: 그런데 엄마, 나 내일 또 국어 시간에 영어 스펠링 모르니까 엄마가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좀 영어로 쓰고 한글 발음도 옆에 써주고
그러면 안돼?
나: 그래., 그런데 뭐라고 말하게?
아이: 내가 말하면 엄마가 영어로 써? 알았지? 지난 토요일에 거라지 세일에 갔습니다. 이것 저것 물건을 샀습니다. 엄마 아빠랑 버거킹에
갔습니다. 햄버거는 맛이 있었습니다.etc.
큰 글자로 영어문장, 한글발음 (빨간 글씨로), 한글 의미 이렇게 다 쳐서 프린트 해줬더니. 아이가 나더러 선생님 역할 하라며 실전 연습까지
한다.
나: 이제 그만 자. 엄마 공부해야 해.
아이: 응. 근데 엄마, 선생님 말을 내가 못 알아 듣잖아. 아, 망했다!!!!
나:#######$$$$$$$$$$%%%%%%%%5
밤
8시 30분
아이: 엄마, 오늘은 책 읽어 주고 이야기 들려 줄꺼야?
나: 아니, 오늘은 숙제해야 하니까 내일 해 줄께.
아이: 또? 왜 맨날 내일이야? 어제도 안 해 주고.., 엄마 나뻐! 거짓말쟁이.
나: 엄마 숙제 안 해가면 내일 학교에서 혼나, 그게 좋아?
아이: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 할꺼 아냐? 무슨 엄마가 맨날 거짓말만 해?
쾅! (문 닫고 나가는 소리. 잠시 후 아이 방에서 엉엉 우는 소리, 아빠의 고함 소리, 흐느낌으로 바뀐 아이의 숨죽인 울음소리!)이 요란하고도
극적인 소리들 사이에서 꿋꿋이 이를 앙다물고 컴 앞에서 공부하는 나. 도대체 무슨 영화를 바라고 이러고 있나!!
잠시 후 아이가 슬그머니 내 옆에 와서 선다
아이: 엄마!
나: (가능한 자상한 말투로) 으응?
아이: 근데, 엄마는 왜 공부해?
나: @@##$$, 어 저..., 응.., 훌륭한 사람 되려고
아이: @@##$$ 아니, 그게 아니고 엄마의 꿈은 뭐야?
나: @@##$$ 응, 저, 어..., 글쎄., 교수 (아이가 아는 직업 중 가장 그럴 듯한 걸로 고름. 내 자신은 이 나이에 공부 시작해서
교수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굳이 목매는 것도 아님 (어차피 누가 시켜 줄 것 같지도 않고)
아이: 교수? 그게 엄마 꿈이야? 근데. 엄마는 그깟 교수 될라고 나한테 책도 안 읽어 주고 공부만 하는 거야?
나:@@##$$$$
그 후 이주 쯤 지난 일요일 예배시간. 목사님께서 각 자 기도요청서를 작성해서 내라고 하셨다. 아이는 볼펜을 달라더니 뭔가 열심히 적는다.
삐뚤삐뚤 쓰여진 아이의 기도제목은
1. 아빠가 성가대를 좋아하게 해 주세요. (아빠는 성가대원인데, 교회에서 별로 웃지 않고 늘 과묵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이 눈에 성가대에서
노래하는 걸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2. 우리 엄마가 교수가 되게 해 주세요.
3. 크리스마스 때 곰돌이가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기도의 힘에 대해서 설명해 준 후 우리 아이의 기도는 자기가 가장 아끼는 곰인형 (영어이름은 케빈 - 자기의 이름 케인과 돌림자로 만든
이름)이 크리스마스 아침에 사람으로 변해서 자기 동생이 되는 것이다. 평소 아이의 지력(?)으로 보아 설마 100% 믿기야 할까 하고 생각하다가도,
너무 진지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믿나 헷갈린다.
어젯 밤.
다음 날 아침 일찍 중간시험이 있어, 시험 준비를 해야 함에도 아이의 기도요청서 사건 이후 가능한 약속을 지키려고 아이와 함께 놀아준다.
카드놀이를 같이 하고,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같이 침대에 나란히 눕는데.., 아이가, 내 손을 꼭 잡더니..
아이: 엄마, 내일 시험이라며?
나: 응.
아이: 이제 그만 가서 공부해
나: 응., 너 자는 거 보고..
아이: 아냐, 됐어. 내가 이제 애기도 아닌데 뭐. 그냥 가. 엄마는 시험 못 보면 학교에서 혼나잖아. 열심히 해. 그래야 훌륭한 사람되지.
나:@@##$$ (잠시 충격을 가라앉힌 후,) 너무 고맙다. 우리 아들이 이제 다컸네... 불라불라
5분도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린다.
아이: 엄마, 공부 잘 하고 있지?
나: 응.,
아이:엄마, 물이라도 한 잔 줄까?
나: 그래. 고맙다.
아빠: 야! 이제 그만 자라.
잠시 후.
아이: 엄마, 잘 하고 있어? 뭐 필요한 거 없어? 나: (아무래도 내 칭찬이 좀 과한 모양이다). 응. 괜찮아. 이제 그만 자 벌써 열시다.
아이: 응. 근데 엄마...
남편: 야! 짜샤! 안 자!!!!!!!!!!!!
친지들 사이에서 우리 아이는 “열 아들 부럽지 않은 한 아들”로 통한다. 열 명의 아들을 합쳐 놓은 것 만큼 훌륭하다는 뜻이 아니라, 열
아들 한 자리에 모아놓은 것 만큼 부잡스럽고, 개구쟁이고, 시끄럽고, 말썽장이고, 기운이 넘친다는 지극히 부정적인 의미다. 옷을 입어도
결코 온순히 팔과 다리를 넣는 법이 없다, 반드시 “메가톤 펀치!!” 이런 고함과 함께 팔을 집어 넣어야 하는 아이.!! 멀쩡하게 학교
버스 기다리다가 난데없이 “나 오늘은 학교 안 가, 가기 싫어” 해서 사람을 기함시키는 아이., 함께 반 나절만 있으면 사람을 나가 떨어지게
만드는 체력과 호기심의 소유자.
내 소유의 집과, 직장과, 친구들, 가족들.., 모두를 떠나와서, 교회에서 얻어 온 시래기 야채들을 다듬어 김치를 담고, 거라지 세일에서
침대보를 공짜로 얻어 와서 쓰고, 아이를 무료 급식자로 신청하고, 한 주 한 주 과제물과 시험에 내 삶의 안테나를 맞춰놓고 살면서.,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하는 회의가 문득 문득 떠오를 때도 많고, 나 혼자 였다면 훨씬 더 많이 공부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엄마가 무심코 내 뱉은 말 한마디를 기억했다가 기도 제목으로 올려 주는 이 아이, 일요일 교회에서 통역 부스에 들어가면
(교회에서 통역 봉사를 하고 있음) 커피를 한 잔 가득 타서 들고 와서는..., 엄마! 잘 해!! 하고 뽀뽀를 해 주는 이 아이가 있기에
다 참고 그리고 인내하기로 오늘도 스스로를 격려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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