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일
학교 입학한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저녁식탁에서
아이: 엄마, 근데 우리 이제부터 집에서 영어로만 말하기로 하면 안돼?
나&남편: @@##$$$ 왜?
아이: 왜냐면, 나 어차피 곧 미국 사람 될 꺼니까..
남편: 뭐?????? (우리 집 호칭을 태극패밀리로 지은 장본인이며 거실 창문에 커텐 대신 커다란 태극기를 걸어놓고 살 정도로 애국심 투철한
양반임.)
잠시 아이의 소양교육을 위해 두 사람은 밀실로 향했고, 그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사나이들만의 비밀이라 공개할 수 없다
나: 오늘 학교에서 어땠어? ESL (초등학교에서 우리 아이처럼 영어를 못하는 외국애들을 대상으로 전문영어교육을 별도로 수업 중간에 시키는
제도) 수업했니? 잘 했어?
아이: 응. 한국 사람은 한국말을 해야 하는데..
(아빠를 흘끗 바라보다가 아빠의 눈과 마주친다)
나: 점심은? 오늘은 뭐 먹었을까? (미국은 급식을 실시하므로 도시락을 싸 주지 않아도 되지만 점심 메뉴가 주로 햄버거, 핫도그, 치킨
너겟.. 이런 종류다)
아이: 햄버거.. (다시 아빠와 눈이 마주친다). 근데 엄마, 나 내일부터 도시락 싸 줘.
나: 왜? 너 좋아하는 햄버거랑 피짜 좋아하잖아
아이: 그게 아니라, 난 한국사람! 한국인은 한국인의 자.존.심. 김치와 밥을 먹어야지. 난. 자랑스런 한국인. 엄마, 나 한국인의 자존심,
도시락 좀 싸 주면 안 돼?
오늘로 미국에 온지 칠십일
조금 전 'Polar Bear'의 모험이라는 영어 동화책을 한글로 읽어주던 중
나: 그래서.., 이 물개는 자기를 기다려 준 곰돌이 친구들이 너무 고마웠...
아이: 엄마, 근데 물개가 유식한 말로 뭐라는 줄 알아?
나: 뭔데
아이: 바로, 워터 도그야. (Water Dog)
나: ??????####$%%%
10월
28일 미국 온지 백 일째
어느 순간부터 아이의 입에선 ‘Oh, my gosh!', 'oops!', 'mommy, daddy!' 소리가 자연스레 나오기 시작하더니,
요즘은 거의 하루 종일 영어로만 말을 한다. 아직 문법도 서툴고 단어도 제대로 몰라서 엉터리 문장을 많이 지어내지만, 나름대로 영어를 빨리
습득하겠다는 고집과 의지의 발현인 듯하다. 특히, 지난 번 영어가 제대로 안 되어서 학교 친구들이랑 다툼이 있고, 그 일로 엄마가 많이
상심한 걸 안 후에는 더욱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투지가 강해졌는지 나에게 영어 단어를 묻는 빈도수가 잦아지고, 티브이를 보면서도 반복되는
단어와 문장을 따라하곤 한다. 너무 영어로 조잘대어 아빠로부터 강력(?)한 경고를 받아 아빠 앞에서는 가능 한 우리말을 하려 하지만, 이미
아이의 능동 언어는 영어가 되어버렸음이 분명하다. 미국에 오기 전 유학 선배들로부터 어린아이들이 영어를 얼마나 빨리 완벽하게 습득하는지와
그에 비례해서 아이의 한국어가 얼마나 빨리, 처참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 얘기를 많이 들었다. 특히, 만 여섯 살 정도의 어린이는 가자마자
영어를 완벽하게 습득하며, 다시말해 한국어는 완벽하게 잊어버린다는 얘기가 정설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미국행이 결정된 순간부터,
영어 공부를 시키기 보다는 집중(?)적인 한국어 공부를 시켰다. 즉, 가능한 많은 책을 읽히려고 노력했고 아이와 대화할 때도 고급 어휘를
늘려주기 위해 어린아이로서가 아니라 나와 눈높이 대화를 하려 했다.
우리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며칠 전 정말 내 가슴이 철렁해지는 사건이 있었다. 우리 아이는 생일이 빨라 한 살 일찍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한 학기만을 마치고 미국에 왔으나, 한국 어린이집의 선행학습의 결과로 이미 입학 전에 한국어를 읽고 쓰는데 거의 문제가 없었다. 며칠 전
저녁, 너무 피곤하고 목도 아파서 아이에게 오늘은 책을 읽어주기 어려우니 아이더러 ‘오늘의 양식’을 좀 읽어보라고 했다. 아이가 글자를
식별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현저히 길어졌으며 단어와 단어 사이의 띄어 읽기가 망가져 있었다. 특히 받침이 있는 글자는 인식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보였다. 너무 놀라서 벌떡 일어나 그 자리에서 받아쓰기를 시켜보았더니 아이는 이미 받침을 헷갈려 하고 있었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남편과 대책회의를 한 후, 그 다음날부터 한국에서 가져 온 ‘지혜성경 (어린이 용 잠언집)’을 하루에 한 장씩 베껴 쓰게 한 후 틀리게
쓴 글자는 다섯 번씩 다시 쓰게 하고 매일 받아쓰기 시험을 보게 하고 있다. 나의 한국어 교수법이 지극히 기계적이고 무미함을 알지만, 다소
강압적이더라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 한 순간에 그 모든 공든탑(?)이 무너질까 봐 안타깝다. 다행히도 아이는 빠른 속도로 한국어를 재생해
내고 있으나, 영어가 느는 속도가 워낙 빨라서 과연 보조를 맞출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남편이 무료로 합기도를 가르쳐 주는 대가로 데이빗의 엄마가 아이의 학교 숙제를 봐주기로 했기에 이제부터는 매일 저녁 아이와 한글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게 되었다. 두렵고 걱정스럽다. 우리말은 단순한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의 정신적, 정서적, 문화적 뿌리이기에,
그 뿌리를 잃으면서까지 익히는 외국어는 바람직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와 남편, 그 아이를 정말
사랑하는 가족친지들이 모두 영어를 완벽히 습득할 수 없는 한, 그리하여 아이와의 교감은 한국어를 통하여서만 가능한 이 상황에서 아이 혼자
영어의 세계에 빠져 그 소중한 교감을 잃게 될까 봐 두렵다. 이 곳에 와서 직접 이민자들이 어떻게 자식들과 분리되어 살고 있는지 알게 되면서
그 두려움의 강도도 높아졌다.
당분간은 아이의 영어 성장이 아니라, 한국어 유지에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영어 빨리 배우겠다고 부러워했던 한국의 내 친구들이
과연 이런 나의 고민을 이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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