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온지 벌써 십 개월이 지났다. 그 동안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변화.
전화벨이 울리면 보통 남편이 전화를 받는다. 그 때마다 어김없이 반복되는 상황.
남편: “Hello!"
상대방: “$$#%%%”
남편: “I am sorry. I don't speak English well. Wait a minute"
그리고 전화기는 나에게 전달된다. 위의 대사는 남편이 외워서 어딜 가나 써먹는 표현이다.
어제 저녁에도 전화벨이 울리자, 남편은 냉큼 전화기를 집어 들고..
남편: (완벽한 영어 발음으로) Hello?
상대방: “I am sorry. I have a wrong number."
다시 전화벨.
나: “여보세요?”
알고 보니, 우리와 친하게 지내는 한국인 교수님이 전화를 하셨는데 남편의 완벽한 헬로에 놀라 그만 전화를 잘 못 거신 줄 알고 전화를 끊은
것이었다. 정작 전직 통역사였던 나는 꼭 영어를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면 철저히 우리말을 사용하건만, 거의 일방통행식 의사소통만 가능한
남편은 언제나 영어로 말하길 즐겨한다. 우리 아파트 사람들은 그가 만날 때마다 반갑게 “Hi!"하며 인사를 하고, 짧은 단어의
발음이 너무 완벽하니까 (thanks, excuse me. Oh, yeah 등) 그가 영어를 엄청 잘 하는 줄 안다. 그래도 그러한 정신으로
십 개월을 버틴 덕분에 요즘 남편은 이 곳에서 생활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어차피 상대방 말은 대충 무시하고 자기 말만 집중적으로
단어만 나열하여 전달하기 때문에..,주로 상대방이 긴장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더욱 집중하여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다. 참,
그리고 그는 영어로 말할 때 눈에 힘을 잔뜩 준다. 기선 제압에 필요하다면서....
아이는 나이가 어려서인지 거의 현지인 수준의 발음과 엑센트를 구사하지만, 내가 고집스럽게 한글을 주입시킨 탓에 가끔 영어 문법에 혼동을
일으키기도 하고, 또 한글과 영어를 동시에 섞어 말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예를 들면 “Mom. I am not 아파.” “I don't
need that 이불”. “give that 소금, please?". 이런 식이다. 영어 발음이 완벽해질수록 그의 우리말 발음이
꼬이고 어색해 지는 것이 현저해 진다. 그래서 무척 안타깝다. 현재 같은 반 친구이며 같은 아파트에 사는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여자애와 ‘모락
모락’ 연애감정을 키워나가는 중.
나: 너, 츄리스 (여자 친구 이름) 좋아하지?
아이: NOOOOOOOOOO!! Mom. I hate you!
나: 그런데 너 왜 얼굴이 빨개져?
아이: (얼굴이 새빨개지며 거의 울상이 되어).. I hate you. You are mean!!!!!!!
나: 너, 엄마랑 결혼한다더니, 벌써 여자친구 사귀고 그럴 수 있어? 엄마가 싫어 진거야?
아이: 아니야. 엄마 좋아 해.
잠시 후
아이: 근데, 엄마?
나: 응?
아이: 근데 엄마 내가 크면 엄마 할머니 되지?
나: 응.
아이: 근데. 엄마. 그럼 내가 할머니랑 결혼해야 되는거네??
나:###$$$$%%%%
지난 해 어느 분이 내 생생일기를 보고 “거의 잠도 못 주무셨겠다”는 리플을 달아 주셨는데 그 걸 보고 남편은 집이 떠나갈 듯이 웃으며
“당신은 하루 열시간씩 자는 사람이잖아?”하며 내 글이 대중을 오도한다며 집중 야유를 보낸 적이 있었다. 어쨌건, 어리둥절했던 첫 학기에
이어 이번 학기에는 꽤 즐겁고 재밌게 공부했던 것 같고, 덕분에 난생 처음(?) 가장 훌륭한 성적을 받게 되었고, 긴 대기상태 끝에 마침내
박사과정에도 입학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아이 출산 휴가를 보낸 기간을 제외하고 단 한번도 이렇게 완벽하게 비생산적인 시간을 보내본
적이 없어 방학이 시작되었을 때 참 난감했지만, 그래도 어쩜 이 자유의 시간이 평생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결연한 심정으로 열심히
나의 생각과 마음이 이끄는대로 독서와 사색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매일 교회 나가 기도하고, 그리고 책을 읽고, 몇 가지 주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 박사과정 통지를 받던 날 축하무드에 젖어 남편과 맥주를 마시며 이러저러한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아이: “엄마. 박사가 뭐야?”
남편: “공부 열심히 하면, 학교에서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으니 하산하시요, 하는 거야”
아이: 엄마, 그럼 교수님 되는거야?
나: 그럴 수도 있지.
아이는 그 다음 날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My mom is now a professor" 하며 소문을 내고 다녔다.
지금은
밤 11시 30분. 아이는 방과 후에 두 시간이나 수영장에서 뛰어놀고도 기운이 펄펄 남아도는지 집에 와서 한 참을 혼자 쿵쾅쿵쾅 거리며,
인형들이랑 궁시렁 거리며 놀다가 매일 밤 반복되는 아빠의 협박 후에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고, 남편도 코를 골기 시작한 지 벌써 두시간 째.
이제 온전히 나 만의 시간이 찾아왔다. 설겆이 하고 밥을 앉히고, 메일을 확인하고, 일기를 쓰고, 친구랑 잠시 메신저로 수다를 떨고, 유학생생일기도
읽고, 그러는 사이 사이에 어제 읽던 책을 마저 다 읽고, 새로운 책을 집어들었다. 어떤 책인지 대충 훑어보고 내일 읽어야지 했는데, 읽다보니
어느덧 독서삼매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 책의 내용에 몰입하면서, 난 예의 그 익숙한 흥분과 만난다. 때로 고개를 끄덕이며 밑줄을 긋고,
때로 고개를 잠시 갸우뚱 하며 메모를 하면서, 때로 반박과 질문을 하면서.., 그러다 문득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내 책이 아니라 빌려 온
책임을 깨닫고 메모한 것들을 지워나가면서 이 책이 내 소유가 아님에 마음이 다 시려온다. 그렇게, 책의 저자와 그 저자가 쏟아내는 일방적인
주장에 나 역시 일방적인 대응과 멋대로의 해석을 하면서 그렇게 오롯이 나만의 세계에서 행복하다. 그리고 그 책의 내용들이 자극한 어떤 주제들에
잠시 골몰하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유학을 앞둔 어느 유학생의 고민이 떠올랐다. 그리고 낮에 남편과 차 안에서 다투었던 일도 떠올랐다. 일상은 사실 참 지루하다.
늘 함께 있어야 하는 가족은 때로 귀찮기도 하다. 관계가 강요하는 의무는 때로 숨통을 조이기도 한다. 현재 경제적으로 어렵고 미래마저 불확실할
때 삶은 지독히도 고단하게 느껴진다. 유학을 오기 전에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 역시 유학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사회에서 자리 잡은 사람들의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물론 그들의 모습이 유학을 결심하게 된 동기는 아니었지만, 실제 유학생활이 그다지 고단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곳에서 직간접으로 만나고 들은 유학생들은 지난한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때때로 (특히 방학을
해서 그런지) 목적 의식을 잊고 회의하는 순간들이 있다. 조금 전처럼 책 속에서 그 찰나의 망각과 몰입이 주는 희열에 완전히 빠져 들고서야
비로서 다시 자신을 곧추 세운다. 가족도 잊고, 내 현실도 잊고, 나를 얽어매는 온갖 관습과 관계를 모두 잊고 그렇게 온전히 책과 사색의
세계에서 완전히 몰입하면서 느끼는 바로 이 “맛” 때문에, 이 마약과도 같은 “희열” 때문에 난 공부를 한다. 학위가 내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혹은 도대체 공부를 무사히 제때에 마치기나 할 수 있을지, 이 모든 의혹과 회의를 무시해도 좋을 만큼 내 생각을 꽉 붙잡아 매는 이 몰입의
순간에 난 완전히 행복하다. 세상의 부귀영화와 그 어떤 무엇과도 결코 바꾸고 싶지 않은 철저한 이 혼자만의 시간과 독서가 주는 깨달음 때문에
난 공부를 한다. 그리고 아직 너무도 부족한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지 않고 희망할 수 있다. 세상과 삶과 인간에 대해서 더욱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으리라는 그 희망. 세계의 지성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그들이 어떤 언어로 말하는지 궁금하다. 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해석하는지 궁금하다.
난 이 궁금증 때문에, 그리고 이 곳에서의 시간과 공부가 나를 더 괜찮은 인간으로 만들어 주리라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매일 매일을
버티고 있다. 그리하여 나를 낙심케 하는 이러저러한 상황과 사건들 속에서도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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